1960년대 대스타, 김지미
4번의 결혼과 이혼
“좋은배우 존재할 수 없어”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세계적으로 세기의 미녀라 평가받으며 30년 가까이 명성과 인기를 받은 대스타인데요.
배우들 사이에서도 뛰어났던 미모와 남성편력으로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라 불렸던 여배우가 있습니다. 바로 김지미인데요.
그는 4번의 결혼과 이혼 후 “잘생긴 놈이나 똑똑한 놈이나 남자는 똑같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김지미는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요?
‘화려한 여배우’로 명예의 전당 입성
1940년 대전에서 태어난 김지미는 아버지가 큰 사업체를 운영하고 미국산 최고급 자가용을 타고 등교하는 등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덕성여고 재학 시절 명동 ‘백조 다방’에서 김기영 감독을 만나 영화계 데뷔를 제안받습니다. 제안을 거절했으나 김기영 감독의 계속된 제안으로 김지미는 ‘황혼열차’라는 작품으로 데뷔합니다.
이후 김지미는 1990년대까지 활동하며 총 450편의 작품을 남깁니다. 특히 1980년대에는 영화사를 직접 설립하고 임권택 감독의 ‘길소뜸’, ‘티켓’등의 명작을 제작했습니다.
1995~2000년에는 한국 영화인 협회 이사장을 맡았고, 2010년 10월에는 한국 영화인 복지 재단에서 선정하는 명예의 전당에 ‘화려한 여배우’라는 타이틀로 헌액됐습니다.
첫 번째 결혼, 영화감독 홍성기
김지미는 파란만장한 남성편력으로 유명한데요. 그녀는 영화감독 홍성기와 1958년 첫 번째 결혼을 합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18세였습니다.
홍성기 감독은 ‘별아 내 가슴에’ ‘여성 일기’ 등을 히트시키는 당대 대표적인 흥행 감독이었습니다. 김지미와 홍성기는 결혼 후 4편의 영화를 찍으며 승승장구했죠. 하지만 1961년 ‘춘향전’ 영화가 큰 실패를 하게 되며 홍성기 감독은 내리막을 걷게 됩니다.
당시 김지미는 홍성기 감독에게 600만 원의 영화 제작비를 대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홍성기 감독은 재기를 실패하고, 1962년, 결혼 4년 반 만에 이혼합니다.
두 번째 결혼, 영화배우 최무룡
1962년 김지미는 한국 홍콩 합작 영화 ‘손오공’ 촬영장에서 함께 출연한 최무룡과 가까운 사이가 됩니다.
김지미와 최무룡의 염문설이 떠돌기 시작했고, 1962년 11월 김지미와 최무룡은 간통 혐의로 경찰에 구속돼 큰 파란이 일어납니다. 당시 최무룡은 배우 강효실과 결혼 상태였습니다.
결국 1963년 최무룡은 당시 국내 최고 위자료였던 400만 원을 지급하며 이혼합니다. 당시 최무룡은 세 딸과 아들 최민수를 두고 있는 상태였고, 김지미는 최민수를 맡아 기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968년 말 두 사람의 이혼설이 나옵니다. 당시 최무룡이 제작했던 영화가 모두 실패했기 때문인데요. 김지미가 사재를 털어 지원했음에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1969년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라는 명언을 남기고 이혼합니다. 둘 사이에는 ‘밍크’라고 불리는 딸이 있었습니다.
세 번째 결혼, 국민스타 나훈아
1976년, 36살이 된 김지미는 7살 연하였던 나훈아와 세 번째 결혼식을 올립니다. 당시 연예계에서는 두 번째 연상연하 커플이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결혼도 6년을 넘지 못했습니다. 나훈아가 1977년 김지미 오빠에게 폭력을 휘둘러 입건이 되기도 했는데요.
결혼과 함께 모든 활동을 중단했던 나훈아가 1979년 컴백을 하며 결별설이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김지미는 “호텔을 다 준다고 해도 무대에 세울 수 없다”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결국 김지미는 1982년 세 번째 이혼을 합니다.
두 사람은 이혼 후에도 주목을 받았습니다. 나훈아가 “남자는 돈 없어 살 수 있지만 여자는 돈이 없으면 살 수 없을 것”이라며 전 재산을 위자료로 넘겼기 때문인데요.
당시 김지미는 나훈아에게 어떻게 살 거냐고 물었고 나훈아는 ‘스스로 알아서 어떻게든 살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네 번째 결혼, 의사 이종구
1991년 김지미는 심장질환의 이종구와 네 번째 결혼식을 올립니다. 이 결혼에는 배우 신성일과의 일화도 있는데요.
신성일은 배우 김지미와도 친하고, 이종구와도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어느 날 이종구는 신성일에게 김지미와의 결혼 소식을 전합니다.
놀란 신성일은 두 사람의 결혼을 만류했지만 이종구는 김지미와 결혼식을 올렸죠. 11년 뒤 결국 두 사람은 이혼하게 됩니다. 이후 신성일과 김지미의 사이도 멀어졌죠.
그녀는 이종구와의 네 번째 결혼에서 가정적인 여성으로서의 변화를 시도했지만 “나는 마누라가 필요한 사람이지 남편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을 하며 자신의 성격에는 주부가 맞지 않음을 고백했습니다.
‘결혼은 선택’, 딸, 손자들과 LA로
김지미는 현재 미국 LA에서 딸, 손자들과 함께 노후를 보내고 있습니다. 2019년 한 인터뷰에서 김지미는 “나는 ‘꿈을 100% 살리려면 가정에 얽매여서 이루지 못할 수 있으니 장래를 잘 선택하라’고 한다”라며 “예전엔 결혼이라면 ‘이 생명 다 바쳐’ 어쩌고 했지만 요즘은 다 안 바치잖아. 각자 선택이지”라며 자신의 결혼관을 밝혔습니다.
지난 2021년, 김지미는 6·25 미군 참전 용사 기념비 건립에 2만 달러를 기부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고,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소중한 목숨을 바쳐 희생하신 용사들을 기리는 역사적인 보훈 사업에 동참하게 돼 기쁘고 보람을 느낀다”라며 “감사의 뜻을 조금이라도 전하고 싶었다”라고 자신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한편, 김지미는 지난 2022년 오랜만에 한국에 방문했는데요. 당시 진행된 김지미의 인터뷰가 화제가 되었죠. 이번에도 화제가 된 것은 김지미의 발언이었는데요.
이날 김지미는 한국영화를 비판하며, 영화판을 저격하는 발언을 남겼습니다. 김지미는 “한국 영화는 난폭한 영화, 흥미나 끄는 영화가 대부분이다. 이런 구조에선 좋은 배우가 존재할 수 없다”라고 전했는데요.
김지미의 발언에 대해, 한 평론가는 ‘절제됐지만 많은 걸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백 번 맞는 소리다’라고 평했는데요.
맞고 틀리고를 떠나, 김지미의 발언이 여전히 화제의 중심이 되는 것을 보아, 1960년대 스타로서의 김지미의 영향력이 어느정도인지 가늠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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